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태지와 아이들 (문단 편집) === 방송국과 가수의 관계를 재정립하다 === 기획사 사장과 방송사 PD가 황제로서 군림하였던 20세기 시점에서, 온전히 서태지와 아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음악을 만들고 춤을 개발하여 유행시켰으며, 1집 이후는 자신들만의 힘으로 스스로 소속사를 만들어 활동하며[* 금전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서태지가 단순히 작곡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음반을 프로듀싱 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방송 언론, 또는 음반업계의 관행, 지금보다 수배는 엄격했던 검열기준, 기득권에 저항한 행보는 단순히 겉으로만 젊고 반항적인 이미지가 아닌 세상을 바꿀 능력과 자신감을 가지고 낡고 곪아버린 기득권의 시스템을 몸소 깨부순 새시대의 상징 같은 역할을 해낸 것이다 이는 K-POP이 [[아시아]]에 큰 영향력을 가지는 2010년 이후 지금의 시점에서도 어떤 가수도 달성하기 힘든 업적이다. 이는 결코 다른 가수들을 폄하하는 의미가 아니라 이런 활동 방식이 어느 시대에 비춰 봐도 지극히 예외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가수들도 나름 높이 평가받을 부분이 있으나, 가수가 시스템에 맞서 주도적으로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서태지가 끼친 파급력이 넘사벽급이었던 것. 지금도 방송국의 권력이 강해서 몇몇 거대 기획사를 제외하면 동등한 입장에서 방송국을 상대할 수 없는 상황인데, 그것도 20대 초반 어린 가수가 직접 방송국을 향해 '''복장 규제를 하면 출연을 안 하겠다'''라든가, '''코미디 프로그램 출연을 강제하면 안 나가겠다'''고 선언한다는 것은 지금 기준으로도 괘씸죄로 찍히기 쉬운 일이었다.[* 이런 압력을 거절하지 못한 가수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최고의 아이돌 가수였던 [[이상은(가수)|이상은]]이 있었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원하지 않는 모습을 계속 TV에서 보여줘야 하는 것이 너무 싫었고 강제로 스케쥴을 이행해야하는 것이 정말 고역이었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래서 당시 활동하던 댄스 가수들은 서태지와 아이들 덕분에 자유로운 스타일링이 가능해졌다고 고마워했다. 활동 후 잠적, 공백기를 가진 이후 다시 컴백이라는 이른바 '휴식기'라 불리는 현재의 대다수 아티스트, 아이돌의 활동 패턴의 시초이기도 하다. 이전에는 컴백, 휴식기 같은 개념이 없었다. 특히 트로트 가수들은 한 번 신곡을 내면 몇 년 동안 쉬지 않고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1996년경까지만 해도 가수들의 활동 기간은 굉장히 길어서, 가을에 나온 노래가 이듬해 여름까지 TOP 10을 폭격하는 경우가 잦았다. 심지어 노래의 인기가 식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사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가수도 있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게, 당시로서는 감히 PD의 명을 거슬러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거니와, 가수로서도 몇개월 사이 잊혀질수 있다는 공포가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이 발매되기 1년전에 있었던 [[유현상]]의 사건이 대표적이다. 물론 그 당시 유현상과 최윤희의 결혼은 정말 9시 뉴스에 헤드라인으로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대사건이라 이를 비밀리에 진행한 것이 큰 일이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당시 한국 헤비메탈의 리더이자 나름 중견급의 프로듀서였던 유현상의 면전에서 방송국 PD가 유현상의 CD를 뽀개버리고 다시는 방송 못내보낸다고 엄포를 놓던게 불과 1년전 일이다. 지금도 방송국 PD가 갑이지만 그 당시의 방송국 PD는 연예인에게 사실상 노예주나 다름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자였다. 그런 엄혹한 시기, 당시에는 통신수단도, 교통수단도 불완전했기 때문에 가수가 활동을 중단하고 TV에 나오지 않으면 팬들로서는 정말로 그 가수가 '증발' 해 버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스스로 음악을 완전히 만들어야했던 서태지였고, 또 그만큼 인기가 많았기에 가능했던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1집 이후 서태지가 이런 행보를 선택했을때, 걱정 하는 사람들도 많았었고 '서태지 은퇴 발표'로 기사가 나기도 했으며, 심지어 '사망설'과 같은 헛소문이 돌아도 팩트 체크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결국 중간에 "이밤이 깊어가지만" 뮤직 비디오를 제작하여 홍보하는등 징검다리 같은 행보를 보여주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 4. 데뷔해서 1996. 1. 은퇴기자회견으로 해체했으니 채 만 4년도 활동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 사이 앨범은 4장을 냈고, 대형 콘서트에도 수 차례 참여했으니 지금 기준으로는 꽤 부지런히 활동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고 지금 기준으로는 '이게 신비주의인가?' 싶을지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그 짧은 공백기간의 의미조차도 지금과 매우 달랐다. 지금이야 SNS를 통해 가수의 활동 정보가 활발하게 공유되고 사진 공유도 어렵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가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수단은 TV와 잡지에 실린 사진 몇장, 정말로 천운을 타고나야 가 볼수라도 있는 콘서트가 전부일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활동을 마치고 TV와 라디오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가, 몇 달만에 갑자기 '컴백'을 해서 지난 앨범과는 전혀 다른 콘셉트와 의상으로 '짠'하고 나타나는 모습은 당시 학생 팬들에게는 경이로운 수준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상표를 떼지 않고 입거나, 스쿨 룩 패션([[서태지와 아이들 1집|1집]]), 레게머리 및 힙합 패션([[서태지와 아이들 2집|2집]]), 치마 패션([[서태지와 아이들 3집|3집]]), 염색 및 스노우보드 패션([[서태지와 아이들 4집|4집]]) 등 '''매 앨범마다 음악에 따라 다른 컨셉'''이라는 시도, 또 이후 연예계에 일반화된 전속 코디네이터 제도의 도입이라든가, 많은 자본이 들어간 뮤직비디오의 질적인 향상[*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는 뮤직비디오를 소속사에서 별도로 촬영하지 않고, 방송국에서 만든 거리나 세트장에서 임시로 촬영한 여러 영상을 뮤직비디오랍시고 갖다 썼다. 사전에 꼼꼼히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즉석으로 촬영된 비디오에 가깝다.] 등등...90년대 이후의 가요계 뿐만 아니라, 사회 다방면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